Page 5 - 밝게 열린 아이들 세상 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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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옛 추억이 있는 세상 옛 추억이 있는 세상 5
감사한 인생
김ㅇㅇ
나는 1959년 5살 때 계명원 문 앞에 버려졌다. 내 목에 이름과 학교 마치고 늦은 시간 원에 들어가면 내가 해야 할 청소구역
생년월일이 적혀있는 목걸이 덕분에 이름과 나이만 알뿐 부모 이 더럽다며 친구들이 떼 지어 나를 욕하고 미워했다. 그래서
苦 難 經 驗 님 얼굴도 모른 채, 그렇게 내 유년시절은 계명원에서 자랐다. 퇴소하고는 계명원 가족들과 연을 끊고 왕래도 하지 않았다
나는 양계석 원장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자랐다.
특히 직장에서도 시설에서 성장했다는 것을 철저히 숨기고 살
여자반 유치부에서 생활하면서 말도 적고 모든 일에 자신감 았다. 아마도 내 어렸을 때의 이야기를 알고 나면, 동료들 또한
청풍복지재단 이사장 양성수 도 없이 자랐다. 나를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내 이야기를 할 것 같아 무조건 입
다행히 서림국민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공부를 아주 잘해서 학 다물고 비밀리에 살았다.
안녕하세요? 교선생님한테 칭찬도 듣고 선생님이 연필 공책등 공부에 필요 1989년 7월 양계석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늘
한 것들을 많이 챙겨주셨다. 자연히 학교생활에 재미를 붙여 먼발치에서만 보곤 하던 계명원을 정신없이 달려갔다. 아버지
요즘 코로나 19 때문에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하고 싶은 일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니 많이 답답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집에는 아이들이 너무 많고 큰 언니들 관 앞에서 나는 주저앉아 통곡을 하고 말았다. 이렇게 가실 줄
힘드시죠? 그래도 모두 열심히 방역수칙 지키고 노력한 결과 우리 모두 건강하게 잘 지내는 것은 고
이 그저 무섭기만 했다. 지금 생각나는 것은 아침마다 많은 아 알았으면 진작 한번이라도 찾아 뵐 걸 너무 후회되어 몇 날 며
통을 참아낸 결과 때문입니다.
이들 틈에 섞여 학교를 가던 일, 식당에 커다란 가마솥, 아침과 칠을 울며 지냈다. 내가 이렇게 당당하게 살 수 있음은 모두가
사람은 누구에게나 시련은 있게 마련입니다.
저녁이면 그 솥 안에서 커다란 누룽지가 요술쟁이 같이 나오 아버지의 사랑 덕분이었는데‥ 그 어려운 생활에도 공부 잘한
시련과 고난에 대처하는 방법에 따라 행복의 수준이 결정 됩니다. 던 일, 까만 가마솥에 빠지면 못 나올 것 같은 무서움이 생각난 다고 칭찬도 해주시고 말씀이 없으시던 아버지께서 살며시 웃
살다보면 불행한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니 왠지 우울하고 세상이 막막해 다. 한번은 미군들이 우리를 월미도에 초청을 해 배를 태워 주 어주면 그날은 너무 행복해 날아갈 것 같았던 아버지를 이 못
져 올 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일을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일입 었는데 그 배를 보고 너무 커서 놀랐고 미군아저씨들이 우리 난 마음에 찾아뵙지 못한 후회 때문에 한동안 힘들게 살았다.
니다. 인생은 자신이 원하는 만큼 좋아질 수도 있고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와 생김이 달라 무서웠던 생각이 났다. 그 당시엔 중학교 고등 어렸을 때 강당에서 예배를 드린 덕에 지금까지 나의 가족 모
학교는 시험에 합격해야 들어갈 수 있을 때였다. 두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니 엄청난 유산을 나는 받은 것과
중학교 시험을 보았는데 나와 순희만 합격하고 다 떨어져 다른 다름없다. 자녀들 모두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당당하게 살고
역사학에 다음과 같은 격언이 있습니다.
친구들은 시온공민학교에 다녔다. 우리 둘만 교복을 입고 다녔 있으니 이보다 더 감사한 일이 어디 있을까?
부모대가 겪은 고난을 체득(體得)하지 못한 세대는 다시 그 고난을 되풀이 하게된다.
는데 또래들이 너무 질투를 하고 우리랑은 놀아주지도 않고 왕 몇 달 전, 남편과 강화로 옮긴 계명원을 찾아 갔다. 정문에 들어
따를 시켜 많이 힘들었다. 많이도 울었지만 그래도 밀리지 않 서는 순간 가슴이 콩당콩당 뛰어서 남편한데 나 못 들어 갈 것
불행한 사람들은 대부분 고난의 세월을 겪으면서 그 고난을 통한 교훈을 배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으려고 놀이에는 꼭 참여를 했던 생각이 난다. 고등학교 시험 같다고 하니 나이는 먹었어도 아직 소녀구나 하며 웃었다. 발
그 점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국민들로부터 배워야 할 바가 있지요. 에도 합격하여 박문여고에 들어갔다. 친구들이 부러워는 했으 길을 옮길 때마다 마음은 설레었지만 마냥 기뻤다.
나 예전과 같이 크게 괴롭히지는 않았다. 경제적으로 많이 어 난 현관에 들어가서 떨리는 목소리로 양성수 원장님을 뵈러왔
이스라엘 나라의 국민들도 우리처럼 고난의 역사를 겪어오면서 자신들이 겪은 고난 속에서 그들은
려웠음에도 원장님은 나를 계속 학교를 보내주었다. 다고 했다. 이사장님은 지금 외출중이어서 만나지 못했다. 나
교훈을 얻어 고난의 역사를 영광의 역사로 만들어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등학교에서도 공부를 열심히 하여 성적은 2,3등을 놓치지 는 어렸을 때 지금 이사장인 성수 오빠를 많이 좋아하고 따랐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움을 격고 나서 그 어려움을 참고 이겨내고 다시는 그런 어려움을 겪지
않았고 특히 영어공부를 좋아해 영어선생님한테 많은 혜택을 나를 키워주신 양계석, 임순례 어르신들이 안 계신 것에 허탈
않으려고 기억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성공합니다.
받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쯤 엄마라는 사람이 나를 찾아 왔 했지만 참 잘 왔다는 생각을 했다.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
옛말에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 나와 많이 닮아서 진짜 엄마일거라고 했지만 난 왠지 서먹 을 보니 내 어릴 적 생각도 났지만 코로나 때문에 않아주지 못
어려움이 닥치면 불평하고 실패할 것인지, 아니면 감사히 받아들여 또 다른 감사를 만들어 낼지는 자 서먹하고 나를 버린 사람이라는 생각에 그냥 방으로 들어와 버 해 서운했다. 후원금 오백만원을 국장님한테 드렸다. 이렇게
신의 마음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렸다. 그 후로 혼자 후회도 많이 했다. 도 따뜻한 곳이었는데 그렇게도 외면하고 살았을까‥. 다음
학교 졸업 후 난 계명원을 나와 자립하게 되었고 결혼도 하고 에 또 오겠다고 다짐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옛날 나를 키
직장인으로 정년까지 하게 되었다. 그동안 난 정말 앞만 보고 워주신 선생님들! 늘 건강하고 행복하시고 감사했노라고 간
열심히 살았다. 절히 기도했다.